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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을 든 시인 “시와 그림은 내가 견뎌낸 기록”

글 윤효정(북DB 객원기자)

       

 

시절이 하 수상하다. 매일 뒤숭숭한 날들의 연속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마음을 애써 삭히다 보면 숯덩이처럼 변해버리기 일쑤다. 이럴 때일수록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는 그림 한 점, 시 한 편 곁에 두는 것도 좋겠다. 혹시라도 김재진 작가의 시가 떠올랐다면,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터. 동물들이 겨울잠을 자러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는 입동, 다음 날. 코 아래로 뽀얀 입김이 나오는 것이 아직은 낯선 계절이었다. 서울 부암동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향해 높은 언덕길을 올랐을 때, 입에서는 얕은 숨이 들썩거렸고 새들의 지저귐과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잠잠히 들려왔다.

 

Q 지난 9월 인터파크도서의 집계 결과, 지난 5년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시집이 작가님의 시집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꿈꾸는서재/ 2015년)였습니다.(관련기사 : 시의 계절이 왔다... 한국인이 사랑한 시집 TOP 10 <북DB> 2016. 9. 30.)

안 그래도 대구에 있는 시인 후배가 기사 내용을 휴대폰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왔더라고요. 그 친구의 연락을 받고 알게 됐죠.(웃음)

 

Q 대중에게는 널리 알려진 반면, 그동안 언론에서는 소식을 자주 접하지 못했는데요.

젊은 시절에는 인터뷰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1995년에 직장을 그만둔 이후 10여 년 동안 문단과는 발을 끊고 살았죠. 제 시선집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꿈꾸는서재/ 2015년)를 보면, 고형렬 시인이 저를 두고 ‘어느 날 문단에서 김재진이 사라졌다’고 표현했을 정도로요. 사실 그럴듯한 출판사에서 책을 내야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도 들어오는데, 저는 주로 제가 편한 출판사와 일을 했고요.(웃음)

 

Q 지난 7월에 펴낸 <입들은 모두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꿈꾸는서재/ 2016년)는 시집이 아닌 그림 에세이입니다.

요즘은 시 쓰는 시간보다 그림 그리는 시간이 더 많은 게 사실이에요. 그림 그리는 게 더 재미있더라고요. 그간 여러 권의 시집을 내면서도 항상 다른 사람이 책의 삽화를 그려줬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제 책의 그림을 제가 그려봤어요. 아, 예전에는 누나가 그려주기도 했어요. 지금은 어머니의 병간호로 활동을 중단했지만 누나가 원래는 화가였거든요. 또 큰아버지가 그림을 잘 그리셨다 하고요. 저희 집안에 그림을 그리는 피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런데도 전에는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살았어요.

 

 

 

병상의 어머니를 위해 벽에 그린 그림... “그림은 내게 우연히 왔다”

 

Q 시인의 삶에서 화가의 삶으로 전환한 데에는 굉장히 극적인 순간이 있었을 듯한데요. 

그림은 우연히 제게로 왔습니다. 어느 날 삽화를 배우러 가는 지인을 따라 백화점 문화센터에 갔던 것이 시작이었어요. 강사를 따라 파스텔을 문질러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고, 그것이 제게는 그림에 대한 최초의 배움이자 마지막 배움이었어요. 그만두는 지인을 따라 저 역시 그만두게 됐고, 하루 두 시간씩 네 차례 정도 수업을 받은 게 전부였어요.

그로부터 두 달 뒤, 문득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죠. 실내로 들어왔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은 호랑나비를 발견했거든요. A4용지 한 장을 꺼내 들고 하얀 여백 위에 호랑나비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쓰다 남은 파스텔 몇 쪽이 그림 도구의 전부였고요. 나비를 그리는 동안 느꼈던 성취감과 희열은 그 뒤 몇 달 동안 눈의 실핏줄이 터지도록 그림에 몰두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저 또한 이런 제가 신기했어요.

 

Q 그렇다면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가 일종의 치유행위였을까요? 

그림을 그리는 동안의 몰입은 제게 안식의 경험이었고, 상상력의 폭발이기도 했어요. 본격적으로 그림에 빠져들었던 게 올해 3월이고, 그 이후로 석 달 동안 밤낮을 잊고 그림에 몰두했으니까요.

 

Q <입들은 모두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의 표지에 실린 입 그림이 인상적이더라고요. 

치매에 걸린 어머니께서 파킨슨병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제 그림을 보면서 재밌어하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문득 벽 위에 입을 하나 그려달라 하시더군요. 아마 누구 하나 찾지 않는 병상에서 고독하셨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린 게 파랑새의 입이었어요. 이 그림은 전시회를 할 때, 캘리포니아에 계신 분이 직접 와서 사가셨어요. 그림을 보면서 당신의 아프신 어머니가 생각나 가슴이 찡했다 하더군요.

 

Q 그림을 그린 지 석 달 만에 전시회를 하신 거예요?

그림을 그려서 하나둘씩 제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그림을 본 지인들이 당장 전시회를 해도 좋겠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래 못할 것도 없지’라는 생각으로 지난 7월에 전시회를 열게 됐어요.(웃음) 보통 전시회를 하기 위해서는 1년 전에 예약해야 하는데 마침 제 친구가 인사동에서 상설 전시회를 하고 있었거든요. 20여 년간 모아온 고대 유물을 국립박물관에 기증한 신영수라는 친구인데, 그 친구가 자신이 전시하던 물건들을 빼준 덕분에 그 자리에서 2주간 전시를 했죠. 
 


Q 전시회 당시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화가 김양수씨는 제 그림을 보고 살아 있는 그림이라며 놀라더군요. <입들은 모두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에 추천의 글을 써주신 미술평론가 유경희씨 역시 제 그림을 보고 진심으로 충격을 받았다 하더라고요. 자신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면서요. 당시 전시했던 그림이 40여 점이었는데 반응이 좋아 전부 다 팔렸어요. 사실 <입들은 모두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에 실린 그림들도 지금은 대부분 팔려서 가진 게 없어요. 개인적으로 아끼는 그림 같은 경우에는 안 팔겠다고 작정을 하고 일부러 비싸게 매겨놓기도 했어요.(웃음)

 

 

 

 

“계속 시 쓰고 그림 그릴 것... 불꽃으로 살다 번개처럼 사라지고파”

 

Q 김재진 표 시와 그림들은 나름의 입장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를테면 치유와 소통의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요.

사람들은 제 시와 그림을 보고 위로를 받는다고 하더군요. 사실 제 시와 그림은 타인을 위로한다기보다 저 자신을 위한 것들이에요. 그래서 특정한 독자를 염두에 두고 책을 내는 경우는 없죠. 다만 너무 어려운 글은 독자가 한정될 수밖에 없으니까 최대한 단순하게 쓰려고 노력해요. 경험과 지혜가 많을수록 사람은 단순해지기 마련이거든요. 

 

Q 작가님 개인에게 있어 시와 그림을 대할 때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소위 말해 시는 ‘그분’이 오면 쓰고 아니면 못 씁니다.(웃음) 예전에는 힘들고 어려울 때 고통스러운 순간이면 번득이는 문장이 떠올랐는데, 요즘에는 그림이 떠올라요. 펜에서 붓으로 도구가 달라진 거죠. 글보다는 그림이 훨씬 몰입이 잘 돼요. 붓을 잡는 순간 완전히 빠져들어서 누가 불러도 못 들을 정도니까요. 제 그림 중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슬픈 기타’라는 작품인데요, 절벽에 매달린 기타와 물구나무 선 청년이 있어요. 이걸 시로 표현하려면 정말 힘들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시보다 그림이 더 쉽게 느껴집니다.

 

Q 계속해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도 모르겠어요.(웃음) 실은 아무런 목적이 없어요. 그저 제 삶이 아팠기 때문에 썼던 것이고, 삶에 대한 결핍이 있으니 채우려는 과정에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던 것 아닐까요? 예전에는 예술지상주의처럼 무언가를 위해 쓴다고 대답했던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밤의 생각, 낮의 생각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걸요. 시나 그림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건 거짓말이라 생각해요. 사는 건 언제나 힘들고, 제 시와 그림은 제가 견뎌낸 기록들이죠. 요즘 그림을 그리면서는 조금 더 행복해졌어요. 그림을 그린 이후부터 제 얼굴이 훨씬 편해 보인다는 이야기도 자주 듣고요.

 

Q 앞으로 어떻게 나이 들고 싶으신가요?

계속해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릴 거예요. 불꽃으로 살다 번개처럼 사라지고 싶습니다.

 

                                                                                                         

                                                                                                                                                             사진 신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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