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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드림의 선물EFT ] 고맙습니다 원장님. (참나로 가는길, 판단 내려놓기/ 내부표상의 주인으로 살 것인가? 노예로 살 것인가? ) 김동화
 [ 두드림의 선물EFT ] 감사합니다. ^^ 최상영
 [ 길을 찾는 사람에게 ] 스님! 엎치락 뒤치락 하더라도 또 다시 유나에 접속,,, 귀한 말슴,잘 들엇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그리구 사랑합니다. 스님! 부디 건강하세요. ()()() 최상영
 [ 길을 찾는 사람에게 ] [발원문] 그들이 열반 또는 해탈에 도달하여 '아라한이 되었다'하는 것은 번뇌를 모두 버렸기 때문입니다. 드러난 번뇌를 버리면 아라한이 되는 것 처럼 생각하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윤회속에 다시태어날 업의 잠재성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아라한이 버리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윤회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탐욕을 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들에게 비번뇌의 무명이 있다고 그대들이 주장하듯이 그들에게는 비번뇌의 탐욕도 있다고 주장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들 소위 아라한들에게 즐거운 느낌이 있는데 이 느낌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그들은 이해합니다. 느낌때문에 탐욕이 생기고 그들은 틀림없이 탐욕의 지배밑에 있는 것입니다. 공에 대하여 완전히 깨닫지 못한 사람이 거친 번뇌를 일시적으로 버린다해도 결국 그 번뇌는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분별없는 선정이 끝나면 느낌과 분별심이 돌아오듯이 그러므로 공에 대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야지만 해탈도 가능한 것입니다. 무명으로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해 윤회속에 보살이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극단인 애착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인데 이것은 공에 대한 명상이 맺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공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추호도 의심을 갖지 말고 우리는 모든것에 공에 대해 명상해야만 합니다. 공에 대한 깨달음은 번뇌장이라는 어두움을 쫓아주는 치료제인데 어째서 깨달음을 얻고자하는 이들이 당장 공에 대하여 명상하지 않는 것입니까?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이든지 두려움은 윤회의 고통의 주요 원인입니다. 그러나 공에 대한 명상은 이러한 고통을 없애주는 것인데 어째서 공에 대하여 명상하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김형선
 [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 ] 2018-2020년 수행일정은 다음까페"위빠사나붓다선원"에 있습니다 많은 언제든지 참여 하실 수 있습니다. 함께 고통의 끝을 봅시다 김열권
 [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 ] 2018년 수행일정은 다음까페"위빠사나붓다선원"에 있습니다 많은 언제든지 참여 하실 수 있습니다. 함께 고통의 끝을 봅시다 김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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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을 찾는 사람에게 ] [발원문] 독을 제거하기 위해 치료사가 만들어 진언으로 봉헌해 놓은 나무기둥이 만든이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어도 세대를 거슬러 아직도 독을 없애주듯이 어떤 보살님이 공덕과 지혜를 쌓아 부처님이라는 기둥을 세워놓고 열반을 하셨더라도 그는 계속해서 중생들의 깨달음을 이끌어 주십니다. 어떻게 모든 관념으로부터 해방된 분들께 공양을 올리는 것이 공덕을 낳을 수 있겠습니까?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이 계시거나 열반을 하셨거나 부처님께 올린 공양은 마찬가지 공덕을 준다고 했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실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면 공덕을 얻게 되듯이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부처님께서 인습적으로 계시든 궁극적으로 계시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게 되면 공덕을 얻는다고 합니다. 네가지의 진리인 사성제 고집멸도(苦集滅道)를 깨달으면 해탈을 얻을 수 있는데 무엇때문에 이런 공관(空觀)에 대해 필요한 것입니까? 경전에 의하면 공을 깨닫지 못하면 성불은 그만두고 해탈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임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어떤식으로 대승경전은 부처님 말씀이라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들 쌍방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이지요. 처음부터 그것은 그대들을 위해서 확인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소승을 받아들이는 기준을 대승에게도 똑같이 적용시켜야 할 것입니다. 만일 어떤것을 가지고 두 가지 다른 측이 인정하는 기준이 된다면 대다성전과 같은 성전도 불교경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대승경전이 반박받기 때문에 배척을 하는 것이라면 소승들의 경전도 배척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것이 외도들에 의해 반박당하고 있고 경전의 일부는 그대들 자신과 남들에 의해 반박하고 있으니까요. 대부분의 대승경전은 삼학(계율, 선정, 지혜)의 모든것을 가르치고 있으므로 마땅히 삼장(경장, 율장, 논장)안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어째서 초전법륜의 가르침은 받아들이면서 제이법륜과 제삼의 법륜은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모든 고통의 원인인 번뇌라는 질병을 치료하시기 위한 약으로 가르침을 펼치셨을 뿐입니다. 그대가 더 높고 심오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실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김형선
 [ 길을 찾는 사람에게 ] [발원문] 환영같은 현상은 마음이 아닌 외부대상도 아니고 마음 자체도 아닙니다. 외부대상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 그리고 외부대상과 의식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둘 다 그릇된 견해입니다. 의식의 대상이 환영과 같고 존재하지 않듯이 의식 차제도 환영과 같고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윤회의 기반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허공과 같이 완전히 비어있을 것입니다. 만일 윤회의 삶이 실제로 존재하는 기반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그런 세계에서 태어나고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대의 생각에 의하면 마음은 독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마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일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해봐야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환영과 같다고 깨닫는다고 어떻게 번뇌가 그치겠습니까? 환영같은 여자를 만들어 놓은 마술사에게서 조차 그녀에 대한 욕정이 일어나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러한 대상을 탐내는 번뇌의 습기(업장)를 버리지 못한 것이며 그 대상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습성이 약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공을 보는 습관을 개발함으로써 실체가 존재한다는 습관이 사라지며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는 견해를 익힘으로써 이 견해 자체도 나중에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만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식할 대상이 없다'하는 말인데 어떻게 기반이 없는 비존재가 마음앞에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마음앞에 존재도 비존재도 남아있지 않을 때는 집착할 대상이 없으므로 마음은 관념적인 활동이 없는 완전한 평정속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김형선
 [ 마음에 새긴 글 ] ()()() 최상영
 [ 마음에 새긴 글 ] 감사합니다. ^^ 최상영
 [ 치유의 책읽기 ] 건강한 유대관계 고맙습니다 ^^ 조수웅
 [ 명상에 길을 묻다 ] 감사합니다_()_ 최순이
 [ 마음에 새긴 글 ] 고맙습니다. ^^ 최상영
 [ 마음에 새긴 글 ] 감사합니다. ^^ 최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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